[카티클/정지민 에디터] 11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자존심, 애스턴마틴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2018년 상장 당시 무려 43억 파운드(약 8조 7,000억 원)에 달했던 기업 가치는 2026년 5월 현재 90% 이상 폭락해 4억 3,000만 파운드(약 4000억원) 수준까지 쪼그라들었다. 007의 본드카로 대변되던 화려한 명성과 달리, 현실의 재무 성적표는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다.
끝없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애스턴마틴은 결국 지난 4월 말, 상장 이후 무려 8번째 긴급 자금 조달에 나섰다. 대주주인 로런스 스트롤 회장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으로부터 5,000만 파운드(약 1,000억 원)를 수혈받으며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영국 현지에서는 이를 두고 부활의 신호탄이 아닌, 생명 연장을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멈춰선 전동화 시간표와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없는 실적 부진은 애스턴마틴의 기초 체력을 완전히 고갈시켰다. 미국과 중국 시장의 관세 인상 폭탄과 글로벌 럭셔리카 수요 둔화가 겹치면서, 2025년 연간 세전 손실은 전년 대비 25% 증가한 3억 6,400만 파운드를 기록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를 막기 위해 전체 인력의 20%에 달하는 약 600명을 감원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 칼을 빼 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미래 성장 동력인 전동화(EV) 전환마저 뒤로 미뤘다. 당초 계획했던 전기차 라인업 투자 예산 중 3억 파운드를 삭감하고 출시 일정을 전면 연기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개발 부담이 적은 하이브리드 모델로 방향을 틀었지만, 급변하는 자동차 시장에서 기술적 주도권을 잃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
1,000억 원의 수혈, 연명인가 부활인가

벼랑 끝에 몰린 회사를 살리기 위해 대주주가 다시 한번 지갑을 열었다. 로런스 스트롤 회장의 ‘유 트리(Yew Tree)’ 컨소시엄은 최근 5,000만 파운드 규모의 새로운 자금 지원 시설을 제공하기로 확정했다. 이는 당장의 유동성 위기를 넘기고 발할라(Valhalla) 등 주요 신차 생산을 이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산소호흡기 역할을 할 전망이다.
이로써 1분기 기준 애스턴마틴의 가용 유동성은 약 2억 3,000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회사 측은 하반기부터 신형 밴티지와 DB12의 인도가 본격화되면 수익성이 개선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상장 후 8번이나 반복된 자금 조달 이력과 여전히 쌓여있는 부채 탓에 투자자들의 차가운 시선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법정 싸움 이면의 ‘큰 손’, 지리자동차

흥미로운 점은 현재 애스턴마틴의 지분 약 17%를 보유한 3대 주주가 바로 중국의 지리자동차(Geely)라는 사실이다. 볼보와 로터스를 성공적으로 부활시킨 지리자동차는 애스턴마틴의 경영난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핵심 이해관계자다. 두 회사는 표면적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미묘한 기싸움이 한창이다.
최근 애스턴마틴은 지리자동차가 런던 택시 자회사(LEVC)에 도입한 날개 모양 로고를 두고 영국 고등법원에 상표권 침해 항소심을 제기했다. 주요 주주를 상대로 법적 분쟁을 불사하는 이례적인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향후 벌어질 지배권 다툼을 앞둔 주도권 싸움의 전초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좁혀오는 포위망, 덩치 키우는 ‘차이나 머니’

막대한 부채와 기술적 한계에 부딪힌 애스턴마틴에게 독자 생존의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전동화 플랫폼을 자체 개발할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외부의 강력한 파트너십은 필수불가결하다. 이 때문에 영국 현지 매체들은 자금력과 기술력을 갖춘 지리자동차 혹은 BYD로의 지배권 이전 가능성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특히 지리자동차는 과거 영국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를 인수해 전동화 브랜드로 탈바꿈시킨 확실한 성공 방정식을 갖고 있다. 자국 경쟁사인 BYD 역시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 확보에 눈독을 들이고 있어, 중국 자본의 애스턴마틴 사냥은 언제든 가시화될 수 있다. 결국 자체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경영권 매각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는 분석이다.

영국의 상징이었던 애스턴마틴은 현재 역사상 가장 위태로운 교차로에 서 있다. 스트롤 회장의 거듭된 자금 수혈이 회사를 완전히 정상화할지, 아니면 중국 거대 자동차 기업의 품으로 넘어가기 전의 유예 기간일 뿐인지는 머지않아 판가름 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기술과 자본의 냉혹한 논리 앞에서, 과거의 화려한 명성만으로는 더 이상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